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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서 배우는 동아시아 외교의 지혜 - 제2회 효명포럼이진한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외교는 명분보다 실리, 국익 우선해야

금과옥조였던 외교 패러다임 바꾼 서희

정세 판단과 사고의 유연성 본받아야

 

부강하지 않았던 고려가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475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외교 덕분이었다. 고려의 외교는 명분보다는 국익을 우선했다. 중국의 많은 왕조가 흥하고 망했다. 그때마다 그 파고가 고려에 영향을 줬다. 주변 강국의 위협 속에서도 오히려 영토를 넓히고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는 실리 외교의 지혜를 잘 발휘했다.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는 제2회 효명포럼에서 ‘고려시대에서 배우는 동아시아 외교의 지혜’라는 강의를 했다.

이 교수는 고향이 평택이다. 복창초등학교와 효명중학교, 평택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원에서 고려시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으며 많은 역사 학회 활동을 하고 있고 국내 최대 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99년도 ‘고려전기 관직과 녹봉의 관계연구’를 저술했고, ‘고려시대 송상왕래 연구(2011년)’,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2014년)’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주로 정치사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고, 대외관계사와 무역사, 해양사를 연구하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한국해양사’는 올해 말 중국어로 번역해 출간할 예정이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원해 출간할 고대와 고려, 조선, 근현대편 등 4권으로 이뤄진 책 ‘한국대외관계와 외교사’ 중에서 고려시대편을 맡아 집필 중이다.

 

역사 속 고려 3번

이진한 교수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청중은 고려사 스토리에 몰입했다.

“을지문덕 장군과 양만춘 장군 등 활약할 때 중국에서 고구려를 부르던 정식 명칭은 고려였고, 궁예가 나라 세울 때 고려라고 했습니다. 918년 왕건이 개국할 때 고려 등 고려라는 국호는 3번 등장했습니다.”

그는 고려는 문화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뤘고 대외적으로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뒀다고 했다. “고려는 후손에게 이미지가 좋아요. 남북이 통일이 됐을 때 국호가 고려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로 1945년 이후 해방 공간에서도 중도세력이 가장 선호한 국호도 고려였다고 밝혔다.

고려는 빈곤한 나라였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매년 경작을 했지만 고려는 당시 3년에 한 번 경작했다. 매년 경작하게 되는 것은 조선 초기다. 인구 증가가 더디고 문화적 다양화 측면에서 뒤쳐졌다. 고려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중국과의 교류로 문화 선진국이 됐다.

“고려시대에는 복잡한 외교적 상황으로 대외관계 관련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외교적, 문화적 발전을 이뤘습니다.”

원나라가 통일하기 이전에는 송나라와 요나라, 송나라와 금나라 등이 패권을 다투고 경합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려는 제3세력으로서 끌어들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고려는 외교적 선택의 여지가 넓었다.

“고려시대 주변의 외세가 많은 침략을 한 이유는 경제적으로 침탈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라인 고려를 침략해 얻을 경제적 이익은 없었죠. 한 마디로 털 게 없었습니다. 다만 동아시아 정세에서 고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세력이 중국을 정벌하기 위해 뒷문인 고려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중원 통일을 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정치 역학 상 중요했다.

거란과 송나라의 대립, 금나라와 송나라 등 흥하고 망했다. 몽골제국이 중국대륙을 통일해 중원의 모든 나라가 사라졌으나 고려는 살아남았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느니 자주성 없어졌느니 하는 평가절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려는 자주성은 훼손됐으나 국호를 유지하고 독자적 왕조를 경영해 나갔습니다. 원나라 황제가 국왕을 바꿔치기도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또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영토를 회복해 나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

 

고려의 실용 외교

그 시대 최강자였던 거란.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고려는 발해유민이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친해질 수 없었다. 또 태조의 외교 프로토콜은 중원의 왕조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고려 역대 왕들은 거란보다 중원 왕조와 가까이 지내며 외교를 했다.

거란이 압록강 부근의 여진을 공격하고 고려를 압박했다. 고려는 거란이 침공하려고 할 때 정보를 통해 알았으나 성종은 송나라 외교에 전력했다. 결국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땅을 떼주자 의견 나왔다.

그렇지만 거란은 남쪽으로 진군하지 않고 평안북도 지역에 머물며 항복을 요구했다. 이유는 거란이 고려를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편으로 만들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거란은 고려를 깊숙이 침공할 경우 송나라의 반격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서희는 협상에 나서 거란이 송나라와 외교하며 우리와 외교하지 않느냐고 묻자 서희는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외교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었고 “앞으로는 사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서희는 압록강 지역 요지인 강동 6주를 받아내고 소손녕을 물러나게 했다. 고려가 풍전등화에 처해있었는데 서희의 외교로 오히려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서희의 정세 판단과 전략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태조의 외교 프로토콜을 바꾼 것입니다. 전 까지는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고 그래서 중원의 송나라와 외교를 해야한다는 프로토콜이었죠. 서희의 뛰어난 점은 정세 판단과 사고의 유연성입니다. 그로써 큰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영토까지 차지할 수 있는 활약을 했습니다.”

 

외교는 국익 우선

이진한 교수는 외교는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고려가 국익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치 않고 주변 강대국이 흥망해도 왕조를 유지해온 고려에서 외교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고려는 주변국가와의 외교에 능했습니다. 그렇지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요. 한때 융성했던 만주국은 현재 만주어조차 없어졌습니다. 고려를 보면 우리 조상의 역량을 볼 수 있습니다. 자랑스러워 할만 합니다.”

이 교수는 당시 한반도에 중국이 가까이 있는 것은 축복과 재양 양면이 있다고 했다. 축복은 최고의 문화선진국 중국의 선진문화를 언제들지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앙은 스스로 독립유지 할 수 없고 늘 주변의 강국에 영향을 받아 좌지우지 됐던 정치적 여건이다.

현재도 중국과 가까이 있는 것이 축복이 될까 재앙이 될까, 이 교수는 “축복이 되려면 우리의 외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용국 기자  rohyk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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