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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소령 예편 후 평생 교직 투신김우룡 전 교장의 발자취

효명중·고교 김우룡(바오로) 전)교장은 평안남도 순천이 고향이다. 대한민국 역사의 현장에서 교육자로 군인으로 적극적으로 그 질곡을 헤쳐 나왔다.

김 교장은 1945년 8·15광복 후 고향 순천여자중학교(1947년)에서 수학교사로 재직 중 소련군 육군 소좌 김성주가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해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공작을 바로 잡는데 앞장섰다.

당시 김 교장은 “김성주는 가짜 김일성이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하던 어느 날 제자가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선생님! 체포령이 내렸어요. 빨리 도망가세요! 우리 엄마가 여성동맹위원장인데 내무서장과 대화 내용을 엿들었어요.” 당시 입을 옷과 여비가 될 몇 가지를 챙기고 6살 아래 동생과 함께 16일간의 사투 끝에 강원도 인제읍 하추리를 거쳐 탈출에 성공했다.

안내원이 “여기가 대한민국 땅이오!”라는 말에 두 형제는 털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는 사랑하는 제자가 목숨을 걸고 살려 준 몸이니 “첫째 한 평생을 교직으로 살게 해 주소서. 둘째, 공산주의는 인류를 멸망시키는 사상이니 나를 멸공사업에 앞장서게 하소서. 셋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내 삶은 내 힘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이오니, 평생 주님의 곁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그 결심을 지금까지 지켜왔다.

그 후 김 교장은 대구계성중학교 3년째 교직생활을 하면서 신임도 얻고 가정도 안정된 무렵 6·25 사변을 맞는다.

인민군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개전 10일째 되던 7월 4일, 연일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에게 유엔 16개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 오산 지역에 투입됐다는 뉴스를 듣고 김 교장은 “전쟁을 남의 나라에 맡기고 나는 가족을 데리고 또 피난길을 떠난단 말인가. 절대로 안 돼. 나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6.25 참전을 다짐했다.

1950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포병학교에 배속된 김 교장은 1951년 전황이 악화되자 최전방을 지원해 30대 나이로 두 제자와 함께 학도병으로 입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당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적군 22명을 사살한 것보다 22명의 학도병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을 더 큰 전과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단다.

1957년 ‘학도병의 학원 복귀령’이 내려져 7년 동안 정들었던 군복을 벗고 소령으로 예편했다.

북한 탈출 직후에 했던 “한 평생 교직으로 살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를 이루게 된 김 교장은 기존의 학교보다 신설 학교에서 소신껏 학교를 운영해보자는 소망으로 57년 4월 효명공업고등학교 개교와 함께 교감으로 부임해 1969년 4월에 2대 교장으로 취임. 1986년 8월 정년퇴임까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효명과 함께 했다.

김 교장은 교직 중에도 1968년 지역성상에 국제로타리 사명을 뿌리내려 사회봉사활동에도 몸담아 지금의 국제로타리 3750지구 송탄로타리클럽 제4대, 5대(1971년~73년) 회장을 지냈다.

정년퇴임 후에도 대한적십자사봉사회 송탄지구협의회 고문을 지냈고 ‘천사봉사인 은퇴식’ 전까지 봉사활동에 매진해 왔다.

스승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김 교장의 교훈처럼 바르고, 굳세고, 참된 효명인이 되자. 김우룡 전 교장은 학교법인 광암학원에서 일만여 명의 제자를 배출한 효명의 산증인이자 영원한 어버이다.

 

노용국 기자  rohyk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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